다급히 울리는 전화를 받고 급하게 아파트 사무실로 달려 갔습니다.


가는 내내 마음이 조급하고 초조 했습니다. 관리사무실에서 전화를 건 직원은 상당히 당황한 목소리 였고, 수화기 너머로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무척 화가 나 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관리 사무실에서 기막힌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듣게 됩니다.


캐나다의 아파트는 대부분이 개인 소유가 아닌 회사 소유이기 때문에 렌트시 그 안에 들어있는 냉장고,세탁기,건조기 등은 고장이 나면 회사에 수리를 의뢰하게 됩니다. 그럼 방문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고 회사 소속 수리공이 집을 방문 합니다. 집에 오면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면 직접 문을 따고 들어 옵니다. 


Repairman illustrationRepairman illustration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가 세탁기 고장 때문에 아파트 관리실에 수리 의뢰를 위한 전화통화를 하시고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도 영어가 부족했지만 제 동생과 집사람은 영어울렁증을 동반한 외국인 두려움증이 상당히 심각 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마주오는 외국인이 인사를 하거나 말을 시킬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그들은 8차선 대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인도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누군가 말을 시킬까봐 벽을 보고 서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수리공이 집을 방문 한 그시간 저와 제 동생은 가게일을 돕기 위해 새벽부터 가게에 나가 있었고 집에는 집사람만 혼자 남아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귀신같이 재미있는 프로를 찾아서 깔깔거리며 보는걸 보면 참 신기 합니다. )


평소 그녀는 초인종이 울려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문을 열면 외국인을 대면하게 되고 , 그럼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니까요. 집 식구들은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따고 들어올 것이고 이 집에 나 혼자 있을때 손님이 오는 일은 없다는 이론 입니다. 


그날 수리공이 벨을 눌러도 평소처럼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집안에 아무도 없는것처럼 TV를 끄고 문에 뚫린 작은 렌즈를 통해 문앞에 사람이 사라지기를 바라보며 숨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세번에 걸쳐 벨을 눌렀습니다. 도어맨이 늘 그러하듯이..그리고 급기야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 시도 했습니다.


가슴이 철렁한 그녀는 정신없이 숨을곳을 찾다가 두꺼운 거실커튼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녀의 공포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문을 따고 들어와 성큼성큼 세탁실을 향해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 세탁기에 전원을 넣고 이리저리 살피는 듯 하더니 이내 장비를 꺼내 분해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녀는 커튼뒤에 숨죽이고 그 모습을 빈틈 없이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해상도 높은 고성능 감시카메라가 그러하듯이...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을 느낀 수리공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커튼뒤에 몸을 숨긴체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뒤로 나자빠지며 소리를 질렀고 그녀 또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 했습니다. 하이톤의 비명이 굵은 바리톤의 울림을 뒤덮고 날카롭게 고막을 때렸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관리 사무실에 사무직 여직원이 집을 찾아와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며 따져 물었고 그녀는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바탕 웃고 며느리의 영어실력을 호소하며 그녀를 변호하였습니다. 수리공의 화는 아직 풀리지 않았고 여직원도 게속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박장대소하며 웃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토론토의 겨울은 깊어져 갔습니다.


토론토 살던 시절은 모든것이 낯설고 부족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걸 추억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

공감하신다면 ♡ ->  (공감은 로그인 안하셔도 가능 합니다.^^)

버거킹의 "베이컨 치즈 더블와퍼"를 삼개월 동안 매일 먹었습니다.


사실 햄버거를 좋아 하기는 하지만 삼개월 내내 그것만으로 점심을 때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것도 발생을 하더군요.


캐나다 이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무슨일로 생계를 이어 나가야 할지 상당한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전공인 사진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만만치 않은 상황 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급여가 문제였죠. 사실 제가 한명의 Photographer 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적어도 3년 정도의 도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야 합니다.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저는 월급을 주기 보다 수업료를 받아야 하는 학생인 셈이죠


그러한 고민끝에 전 웹디자인 을 공부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무엇이든 공부하지 않고 뛰어들기에는 저 자신에 대한 믿음도 덜 한 시기 였구요. 기본적인 포토샵 등의 그래픽 프로그램 이미 습득한 상황이니 웹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될 것 같았죠.


그러 그러한 과정을 거쳐 웹 디자이너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로 유학원웹사이트를 만들어 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유학원에 취직을 하게 되었지요. 문제는 웹사이트가 다 만들어지고 나자 제가 할 일이 적어졌습니다. 하지만 당 유학원의 주력 국가가 캐나다 였기 때문에 저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마치 이미 쓰여진 시나리오 대로 흘러가듯 살아지는 걸까요?


상담을 하고 사이트에 넣을 컨텐츠를 알려면 그곳에 가서 직접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밴쿠버 지사로 발령을 받아 캐나다로 넘어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직원들은 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더군요. 본인들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것으로 보여졌나 봅니다.

Vancouver Airport Arrival Hall

사설이 길었네요..

그래서 제가 맡게 된 임무는 밴쿠버로 넘어오는 유학생 및 그 가족들의 픽업과 랜딩 업무 엿습니다.


공항에 기다렸다 그들이 나오면 픽업해서 숙소로 데려다 주는것이 이 일의 첫 시작입니다.

캐나다로 넘어오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오로지 찾고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인거죠.

공항 출국장에서 나와서 피켓을 들고 있는 저를 보자 마자 그들의 눈에 안정이 돌아오고 굳어진 어깨가 펴지는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로 나오자 마자 저를 찾는데 제가 없으면 그들은 미아가 되어버린 심정에 사로잡힙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패닉에 빠지고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 합니다.


그들이 나오는 시각은 정말 예측할 수 없고 천차 만별 입니다. 짐을 잃어버린 사람 , 이민국에 끌려가 고역을 치루고 있는 사람 , 예상했던 시간보다 너무나 빨리 나오는 사람. 정말 누구 하나도 예측대로인 경우가 없죠. 제가 식사를 하고 있는동안 나와서 우왕좌왕 하다가 공중전화를 찾는데 엄청 고생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제게 전화를 걸어서 전화받고 그 자리에 가 보니 엉엉 울고 있던 여자학생이 있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너무 과장되었다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일이 안되려면 정말 여러가지가 막히는 법이니까요.지금은 휴대전화를 로밍해서 가져오니 그런 경우가 덜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식당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화장실도 넉넉한 시간에 미리 다녀왔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했죠. 밴쿠버 공항에 버거킹 이있습니다. 그곳에서 게이트가 바로 보이고 게이트에 나와서 찾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엇죠. 그래서 그곳을 제 아지트로 정하고 식사도 그곳에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그곳에서 식사를 하기에 이르른 것 입니다.


Vancouver Airport Arrival Hall 2


그들이 떠나기 전 항상 서울 사무소 에서 제가 만들어 둔 팜플렛을 손에 쥐어주고 보내도록 했습니다. 제 사진과 전화번호 ,그리고 출국장으로 나와 왼쪽을 딱 보면 버거킹이 있습니다. 그곳에 제가 있습니다. ( 20년 전 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습니다.^^ )


숙소에 데려다 주고 나면 공식적인 제 일은 끝이 납니다. 물론 가족이 같이 와서 랜딩서비스를 해 주어야 하면 일주일을 꼬박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오전에 픽업 업무를 마치자 마자 부터 하루 종일 그들의 전화기를 개통해 주고 , 차를 사고 , 미리 조건에 맞게 물색해 둔 집을 보러 다닙니다.집이 결정되어 지고 나면 가구와 전자제품을 사러 돌아다닙니다. 


가끔 캐나다에서 온 가방을 보았다며 특정 제품을 고집해 찾으러 다녀야 하는 일도 발생 합니다. 새벽 세시에 난방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며 전화를 하는 아이 어머니도 있습니다. 한 밤중에 아이가 아픈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허둥지둥 전화하는 보호자도 있었습니다. 저는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찾아가 문제 해결을 도왔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아이를 업고 뛰었구요.


사실 귀찮고 성가시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하지만 출국장에서 저를 보면 환하게 펴지는 그들의 얼굴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캐나다에 유일하게 알고 있는 지인이 저 인것 입니다. 그 막막한 가운데 알고있는 저마저 그들을 귀찮아 하며 대한다면 그들의 유학 생활이나 이민 생활은 상처받고 구겨져 버린 체 시작 됩니다. 그 상처가 아물고 주름이 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 합니다. 그런 그들이 이후에 오는 한국인에게 동포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게 될까요?


전 정말 그들에게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저의 서비스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겁니다. 자기의 눈높이에 따라 생각하게 되는 법 이니까요.


이민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충고가 "한국사람 조심해라" 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이해 할 수 없고 , 이해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물론 왜 그런말이 나오는건 줄은 압니다. 앞에 소개했던 저희 가게 "Mother's Taste"는 믿었던 아버지 친구의 배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접었습니다. 정말 그런 현실이 싫었습니다. 저희가 이민 간다고 해서 캐나다 사람 되나요? 시민권을 따면 미국인 인건가요?


전 캐나다 이민생황을 접어놓고 지금은 미국으로 가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 한국인이죠. 주변에 중국 이민자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요즘은 베트남 사람들도 많이 보이구요. 그들은 정말 잘 뭉칩니다. 서로서로 돕고 ,새로 이민온 이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려 노력 하더군요. 


저는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한명 그런 생각 가지고 있는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밖에 나와보니 정말 그리운게 많습니다. 이렇게 나온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와 각자의 사정이 있겠죠. 하지만 누구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전 작으나마 제가 가진 온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구요.


쓰고 나니 횡설 수설 제 바램만 장광설 늘어놓았네요.

하지만 읽는 분들이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실거라 믿습니다.^^


같이 살아 가는데 온기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공감의 온기도 나누어 주세요...^^


  1. 담터댁 2018.04.21 14:53 신고

    케이님 블로그 타고 왔는데 버거킹에서 저녁 먹게됬어요 ^^

    • Dreaming Utopista 2018.04.21 15:08 신고

      방문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렇게 먹었는데도 저도 아직도 버거킹 많이 먹습니다.^^
      혹시 한국이시면 할인쿠폰 잊지 마세요..^^ㅋㅋ

  2. 담터댁 2018.04.21 15:15 신고

    외국 버거킹이 더 짜고 큰가요??외국에 나가본적이 없어서용

    • Dreaming Utopista 2018.04.21 15:34 신고

      ㅎㅎ
      제가 음식에 민감하지 못해서...
      버거의 크기는 많은 차이 없는것 같고 맛도 비슷해요...
      후렌치 후라이가 엄청 짜요...
      또 거기다가 소금을 뿌려 먹더라구요...아휴...
      우린 캐첩 찍어 먹는데 북미사람들은 보면 소금을 많이 뿌리더라구요...

  3. sunny 2018.04.21 20:31 신고

    참 치열하게 사셨네요... ^^

    • Dreaming Utopista 2018.04.21 20:34 신고

      그러게요...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는데..
      지금 돌아보니 제가 참 짠하네요..ㅎㅎㅎ

  4. 2018.04.22 01:36

    비밀댓글입니다

    • Dreaming Utopista 2018.04.22 11:03 신고

      그렇게 이야기 해 주시니 제 마음이 너무 좋습니다.^^
      사실 이번 미국 가서는 정말 대단한 환대와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래도 되나..할 정도 였습니다.
      그때 생각하길 예전에 내가 해놓은 일에 보답을 받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죠..^^
      저도 얼른 적응하고 자리 잡아서 새로 오시는 분들에게 그런 따뜻한 도움과 환대 드리고 싶네요..^^

  5. TheK2017 2018.04.23 03:59 신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호의를 둘리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요.
    그런 사람인지 가릴 수도 없구요.
    다만 당신이 옳고 그렇게 산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Dreaming Utopista 2018.04.23 11:44 신고

      방문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삽니다.
      그래도 이런 과찬을 받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님에게도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6. 밤익는냄새 2018.04.23 18:07 신고

    캐나다에 처음 오는 분들에게 Utopista님은 큰 의지이자 버팀목이겠어요. 본의 아니게 패스트푸드를 많이 드셨지만.. ㅎㅎㅎ 일에서 보람을 느끼시니 참 멋지세요^^

    • Dreaming Utopista 2018.04.23 18:21 신고

      ㅎㅎ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좀 그런게..님들의 방문을 받고 제 글을 다시 읽어보니 너무 자화자찬 같아서,,너무너무 쑥스럽습니다. 그때는 정말 제가 좋은 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누가 이렇게 해 주겠어...이렇게 생각하면서요...
      근데 생활 해 보니 그런게 몸에 베어잇는 분들이 주위에 산처럼 많습니다.ㅋㅋㅋ
      세상 아직까지 살만한 세상 입니다.^^

해외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되고 효자가 된다.


저는 늦은 나이에 이민을 가서 외국에서 학교 생활을 해 본 경험은 없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제 나이는 한국나이로 26세 였기 때문에 부모가 이민을 간다고 해서 따라 갈 수 없는 나이였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 파일을 따로 수속하지 않고 아버지 파일에 합쳐서 수속을 해 주는 바람에

그 늦은 나이에도 아버지 따라 이민 갈 수 있었던 거죠.

아마도 수속 당시에는 대학 졸업반으로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 였기 때문에 학생으로 간주 해 준것 같아요.


제 동생은 당시 중학교를 졸업할 시기라 캐나다에 들어가서는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 들어오게 되어 6개월에 한번꼴로 캐나다와 한국을 왕복하는 생활을 했었죠.

사람 운명이란게 정말 웃겨서 미국으로 이민 간 지금도 6개월마다 왕복하는 그 생활을 또다시 반복 하고 있네요.


이 이야기는 저는 한국에 주로 생활하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만 캐나다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집 전경 : 10 MUIRHEAD RD APT


부모님이 한국으로 일을보러 들어오셨는데 그 일이 상당히 길어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 동생 혼자만이 캐나다에 남아있게 되어버린 상황이었죠.

그 생활이 결과적으로 2년이상이 걸려버렸던 시기 입니다.


제 동생 혼자 남겨진 지 한 일년쯤 되었을 무렵 저는 한국에서 밴쿠버 지역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캐나다에 가도 밴쿠버와 한국만을 왕복하던 시기였는데,

운좋게도 밴쿠버에 출장 갔다가 토론토에 갈 일이 생겨 몇년만에 동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와 7살이나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 이었기에 항상 맘에 걸렸었는데 너무나 고마운 기회였죠.


저녁무렵 집에 도착해서 만난 제 동생은 정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190cm 가 넘는 신장에 100kg 이상의 거구였던 제 동생이 70kg 까지 살이 빠졌더라구요.

집에는 녀석이 외롭기도 하고 넓은집 그냥 비워두는게 아깝다며, 룸메이트 들과 함께 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동생까지 모두 4명의 남자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의 냉장고는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빈약했구요.


맥도날드 매장을 접수해 버리다!!

맥도날드 버거 세트 사진


다음날 일어나 아침을 시리얼로 대충 챙기고 체육관에 가 2:2 농구로 땀을 쭉 빼고나니

다운타운에 나가 이놈들에게 뭔가 먹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놈들이 원한 먹거리는 "맥도날드"였습니다.

소박한 녀석들...^^


매장에 들어가 카드를 건네주고 마음껏 주문하라며 호기롭게 앉아있던 나는 세상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위의 그림이 제가 예상하고 있던 그림 이였죠.


그런데 그들이 가져온것은 햄버거 50개 였습니다ㅣ.

일인당 버거를 10개씩 50개의 버거를 각각의 트레이에 담아서 가지고 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더욱 놀라운것은 후렌치 후라이도 없이 버거만 가지고 왔으며

콜라는 라지 사이즈 딱 한잔 이었죠.


그리고 버거는 99센트 짜리 치즈버거 였구요.ㅠㅠ


이게 도대체 뭔 일이냐며 묻자 "저희는 이렇게 먹어요" 라며 아무일 없다는듯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배가 고프기 때문에 그들의 외식은 배가 불러야 하고 일인당 5불을 넘지 않아야 한답니다.

오늘은 형이 쏜다니 특별히 10불을 쓴 거구요..


콜라는 리필이 되기 때문에 빨대만 5개 가져오고 큰 컵에 가득 담아 같이 먹으면 되구요.

누가 뭐라지 않는데 정말 제 얼굴이 다 화끈 거렸습니다.

그래도 그녀석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주기로 하고 먹기 시작 했습니다.

저는 세개째 먹으니 너무 물리고 질려 도저히 못먹고 동생들 먹으라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걸 또 다 먹어 치우더군요.

다먹고 나갈때는 걸으면서 먹어야 한다며 콜라를 가득 리필하구 나왔습니다.


나와서 길을 걷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참 복잡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TV를 보는데 맘이 안좋았습니다.


눈치 챘는지 녀석들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동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학생들이었고 처음엔 홈스테이에 용돈도 팡팡 쓰면서

즐겁게 유학생활을 만끽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점점 캐나다 생활에 익숙해져 가니 지금 자기에게 들어가는 돈이 얼마 정도 되겠구나 하는게 계산되고 , 

그러고 나니 부모님이 이 돈을 보내 주려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룸메이트를 구하는 제 동생에게 부탁해서 집 월세를 쉐어하는 방법으로 돈을 아끼고

늦게온 녀석은 영어와 히스토리 등을 함께 공부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함께 살며 한번도 술파티 벌인적 없고 부모님 집이기 때문에 청소도 열심히 하면서 살구요.


이미 무슨전공으로 해야 할 지에 대해 서로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대학교 투어도 같이 다녀왔더군요.

그런 돈은 아끼지 않고 쓰기로 했답니다.

녀석들의 생각이 나이에 비해 크다는 생각이 들었고 , 뿌듯 했습니다.


유학생활 이라는게 그런것 같습니다.

어렸던 녀석들이 부모님을 생각하게 만들고 , 자신의 미래 또한 스스로 결정 할 만큼 마음도 커지구요.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안해 하는 부모님들이 가끔 저와 대화할 일이 생기면 전 늘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하니까요.

그렇게게 되도록 되어 있는거죠. 앞으로 나아 가도록...


  1. ppalli5 2018.04.11 17:43 신고

    포스팅 잘보고갑니다 ^.^
    좋은저녁시간 보내세요

  2. 부부노마드 2018.04.11 20:35 신고

    유학생활과 해외 생활이라는게 혼자서 결정할 일도 많고 부모님 걱정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좋은 글 읽으러 자주 올게요^^

    • Dreaming Utopista 2018.04.11 21:28 신고

      ㅎㅎㅎ 어린녀석들이 기특하도라구요
      뭐 부모 걱정이야 한도 끝도 없겠지만
      믿어주면 올바로 갑니다
      저희가 올바로 키웠잖습니까?..ㅋㅋㅋㅋ
      방문해 주셔서 영광 입니다..^^

  3. _Chemie_ 2018.04.12 01:11 신고

    아 햄버거를 50개를 가지고 왔다고 해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저렴하게 배를 채우기 위한 방책이었던 거군요.
    정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Dreaming Utopista 2018.04.12 12:05 신고

      그때 당시에는 저도 맘이 좀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맘아픈 일은 아닌것같아요.
      추억이고...좋은 기억 입니다..^^

  4. Deborah 2018.04.12 01:29 신고

    동생분이야기 진솔된 마음을 열어준 글에 대해서 감사드려요
    유학생활 힘들죠. 타지에서 지낸다는 자체가 힘들고 언어적 문제와 음식, 문화적 차별이 가장 큰 난간이지만
    이렇게 동생분은 햄버거로 허기를 채우고 또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 이런것이 엿보여 참 대견했던 심정이
    헤아려집니다. 삶의 향기가 전달되는 멋진글 감사하게 읽고 갑니다.
    처음 방문인데요. 개설한지 얼마 되지 않으셨군요. 운영을 잘 하실거라 믿어요.
    자주 놀러와도 되죠? 친하게 지내면서 힘든 외국생활의 어려움도 같이 나누어요.
    그 마음 다 이해하닌까요.

    • Dreaming Utopista 2018.04.12 12:08 신고

      소중한 댓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어디에 살던 사람사는게 여러 좋은일 나쁜일 섞여있지만
      외국에서 특히 느껴지는 약간의 서글픔...^^ 그런거 있는거 같아요.
      사람도 그리워 지고요..ㅋㅋㅋ
      반갑습니다..

  5. 금빛향기 2018.04.12 04:28 신고

    타지에서 생활하기 쉽지 않죠^^ 글 잘 보고 갑니다 ~

  6. 새이비 2018.04.12 11:57 신고

    저도 동생과 나이차이가 6살 정도 나는대... 저는 동생과 그렇게 친하지가 않아요 ㅜ 나이차이때문에 함께 놀지를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먹서먹.. 그리고 형제라서 더 서먹서먹 ㅎㅎㅎ 동생과 사이가 좋으신것 같아서 부러워요!!! ㅜ 저도 동생이랑 밥한번 먹어봐야겠어요 맥도날드고고 ㅎㅎㅎㅎ

    • Dreaming Utopista 2018.04.12 12:11 신고

      ㅎㅎ
      갑자기 부끄럽네요
      동생과 친하게 지내지는 못해서..ㅋㅋ 자주 못봐요...ㅠㅠ
      저도 그때 생각하며 동생만나 밥 한번 먹어야 겠네요....

  7. Mr. 코알라 2018.04.12 18:08 신고

    와우!!! 50개 매장직원 열심히 만들었겠어요! ^^ 자주 놀러 올께요~! ^^

  8. 팍이 2018.04.14 12:45 신고

    동생과 사이가 정말 좋으신거 같아요 ㅎㅎㅎㅎ 저도 오랜만에 동생이랑 밥한끼 하러 가야겟어요 ㅎㅎ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건 처음 봤다.


Google Capture : Large crowds of Toronto streets


아침을 먹고 집에 있는데 다급히 전화벨이 울렸다. 이상하게도 같은 벨인데 다급하게 울려서 

받아보면 꼭 급한 일이 있다.빨리 가게로 나오라는 어머니 전화였는데 정말 큰일이 난것 같은 

말투여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얼른 옷을 챙겨입고 버스를 타러 나갔다. 

거의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도착을 한 가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 났구나 직감하고 사람들을 비집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또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가게는 온통 영화배우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대부분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식스펙을 장착하고 ,

그런 멋진 얼굴로 태연하게 상의탈의를 한 모습은 전에도 본적이 없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A group picture of handsome guys


모두들 하나같이 즐거워 보여 내 기분도 덩덜아 살짝 들뜨는 느낌 이었다.

아버지가 이야기 해 주시길 토론토에 큰 축제중 하나인 "Gay Pride Toronto"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인파들 이라고 했다.

사실 상당히 생경한 단어였고 , 정말 처음 보는 광경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꼭꼭 숨기고 들키는 날에는 집안이 풍비 박살 날 일 아닌가?


난 그들에 대해 동요하지도 반대 하지도 않는 입장 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사실 우리나라 살면서 접해보지 못한 단어 중 하나 아닌가?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부끄러워 보이는 이가 없었고, 

너무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각설하고 , 가게는 정말 인산 이해를 이루었고 우리 음식을 너무나 좋아했다.

특히 비빔밥과 김치는 정말 재료가 동이 날 지경 이었다.

사실 가게가 쉴 예정인 날이었는데 아버지가 어디서 정보를 접하고 

오늘은 열어야 한다며 특별히 가게를 오픈한 날이었다.

안열었다면 정말 후회 할 뻔 했다.


어머니는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그들과 연신 대화를 나누며 손으로는

열심히 김치를 담고 계셨다.

그들에게 맛보라며 무료로 손마다 들려줘서 내보내는 바람에 한달은 써야 할

김치가 모두 동이나 버렸다.

한명이 맛있다며 따로 사 갈 수 없냐고 물었는데 어머니가 그냥 싸 주신거다.

다른 사람들도 모른척 할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모두 한봉다리 씩 김치를 들고 나가는게 정말 우스꽝 스러운 풍경이었다.


Gay pride Toronto 2018


살면서 그렇게 유쾌한 사람들을 본적이 드물다.

그들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만약 있었더라도 정말 한방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정말 가보고 싶다.


그때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고 다르랴?

그 유머러스함과 자유로움이...

지금처럼 SNS가 있었다면 정말 모두 친구추가 했을텐데...


떠나고 싶다.

그 자유로움에 흠뻑 빠져 나 자신을 잊고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그러려면 식스팩 하나쯤 마련 해야 할텐데...

없어도 뭐 한번 미쳐보는거지 뭐..^^

토론토의 겨울은 내가 상상한 이상으로 추웠다.

Google Capture : 10Muirhead Rd Apt

걸어서 어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래도 너무나 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 쪽문으로 나가서 대로를 그대로 무단 횡단 하면 바로 "시어스백화점"이 있는 몰이 있었다. 심심하면 거기까지 빠르게 걸어 가곤 했는데, 잠깐 걷는 동안 숨을 쉬면 들어마실때 마다 콧털이 빳빳하게 얼었다가 내쉬면 녹았다. 도착하면 항상 거울을 봐야 한다. 코 아래 하얀 길이 나 있어서 영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당시에 거기 가는게 주말에 낙이었는데, 지금 사진으로 보니 정말 미친짓이었네!! ㅋㅋ심지어 저 도로는 Highway...ㅋㅋㅋㅋ


그래도 다행인것은 토론토에 "Metro"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이 연계되어 있는 시스템인데 당시 우리나라 대중교통이 너무나 저렴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살짝 놀랐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꽤나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 된다. 우리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지하철 역이 없기 때문에 우선은 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고 다운타운에 나가야 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던 날로 기억된다. 늘 하던대로 가게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 지인 부부가 가게에 찾아 오셨다.원래 알던 분들은 아니고 성당에서 알게된 가족이었다. 가게를 마치고도 흥이 식지 않았는지 부모님들은 그분들 차를 타고 2차를 가셨다. 내가 아버지 차를 몰고 집으로 가려는데 미친듯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토론토는 눈이 내려도 사실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눈이 한덩어리라도 떨어지기 시작하면 정말 미친듯이 제설차가 다니기 시작 한다. 도로는 정말 눈 하나 없이 깨끗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청난 염화칼슘 살포와 제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암튼그렇게 집에 거의 도착해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려는 찰나 스톱사인에 차를 세웠다가 다시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차가 멈췄다.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헛기침 처럼 헐헐헐헐...소리만 나고 시동이 걸리질 않았다. 정말 낭패였다. 내가 지하 주차장 입구를 막고 선 것이다. 너무 당황해서 눈앞이 캄캄할 즈음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견인차가 눈앞에 나타났다. 대박!! 이게 바로 선진국? 카메라로 보고 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ㅋㅋ


그가 차에서 내리더니 날 아는척 했다. 그는 2206호 산다고 했다. 우리집은 2106호 였다. 이런 반가울데가..

엘리베이터와 체육관에서 날 자주 봤다고 한다. 심지어 지하 사우나에서 사우나도 같이 했단다. ( 우리 동 지하에 사우나도 있다.^^ ) 날 친구라 불렀다.무슨 일이야 물어서 내 차가 시동이 안걸린다고 하자 걱정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더니 점프케이블을 들고와 시동을 걸어주었다. 눈은 오고 방밥도 없었는데 너무나 고마웠다. 용기를 내 나도 친구라 불러봤다. Hey  Buddy ,Really! Really!! Thank's for that!!


그의 대답은 실로 놀라웠다. 고맙긴 뭘...50불만 내...

What?!!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어서 황당한 얼굴로 쳐다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라 할 수 없어서 50불을 건네주고 씁쓸하게 차로 돌아와 차를움직여 지하일층으로 내려와 자리를 찾아 돌던 중 갑자기 차가 또 멈춰 버렸다. 아..정말 짜증이 솟구쳤다. 얼른 그 친구..ㅠㅠ를 찾았다. 차를 대고 올라가려는 그를 급히 불러세워 차가 또 멈췄다 이야기 하자 그가 대답했다. 걱정하지마 친구...ㅋㅋㅋ


얼른 차를 다시 내쪽으로 몰고와서 다시 점프를 해 주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2차 요구가 들어왔다. 50불이야...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까 줬잖아!! 내가 소리 지르자 그는 놀라고 당황한듯이 내게 따져 물었다. 

야 원래는 100불인데 우리는 이웃이기 때문에 내가 50불만 받은거야!!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다시 차를 움직여서 일을 해 주었는데 50불만 받았자나. 근데 넌 왜 화를 내는거야? 뭐라 말 할 방법이 없었다. 아..정말 영어의 중요성이란....

그리고 혹시 이게 그들의 문화인데 내가 무경우 한건가? 이런 생각에 다시 50불을 주고 얼른 차를 대고 집으로 쌩하니 올라갔다. 그날밤 잠이 오질 않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난 그 사람이 너무하단 생각이 아직 든다. 이웃인데...그리고 뭐 점프한번 해준걸 가지고...

하지만 한편으로 그가 일반이이었다면 너무한게 맞지만 그의 직업이 견인차를 몰고 이러한 일을 처리해 주는 전문가라면 당연히 돈을 받는것이 맞고, 50불로 깎아준건 정말 친절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 그녀석도 친절을 베푼 내게 실망하고 화가나 잠을 못잔건 아닐까?

아님 호구녀석..하며 웃고 말았을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2018/03/31 - [이민/지난 이야기 ( 캐나다 )] - 이민생활1

2018/04/02 - [이민/지난 이야기 ( 캐나다 )] - Mother's Taste in Toronto : 토론토 맛집

당시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핫 했던^^ 식당을 소개 합니다.

Ryerson University

우리 보다 먼저 들어오신 부모님은 당시 친구에게 소개 받아 다운타운에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위치는 다운타운 한 복판에 있는  "Ryeson University" 의 메인 출입구 옆이었다. 가게의 이름은 "Mother's Taste" 였는데, 가게 이름을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는 모든 음식에 설탕다시다를 대량 살포하시는게 특징이이라 집에서도 외식을 하는 느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의 취향이라니...ㅋㅋㅋ 아마도 "어머니의 맛" 뭐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자 했던 것 같다.


당시에 난 사진학과를 갓 졸업한 상태라 대단한 장비를 보유하고, 사진에 대한 심오한 "어깨뽕"이 잔뜩 들어있던 상태라 아이러니 하게도 가게 사진 하나 찍어놓지 못했다. 그 흔한 가게에서 찍은 기념사진 하나 없는걸 보면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간단히 찍을 수 있을때 진정 생활의 사진이 나오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거창한 장비로는 거창한 사진만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의 어리석음이란...


우리 가게는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저녁 10시에 문을 닫았다. 일요일 하루만 문을 닫았다. 정말 대단한 중노동이 아닐 수 없다. 이민 1세대 들의 고생이란 늘 그러하다. 나도 우선 이렇다 할 일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니었으므로 아침을 먹고나면 버스를 타고 가게를 나가는게 일상이 되었다. 여기서 일도 돕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북미문화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가게의 주 메뉴는 "테리야끼""라자냐" ,"중국식 누들", "베트남 식 볶음밥" 등의 퓨젼 이었다. 아버지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기에 한국인을 상대로 한 식당이 아닌 현지인을 대상으로 기획된 식당 이었다. 거기에 어머니가 주장하여 "비빔밥" 과 "김치"를 추가 메뉴로 구성 하였다. 식당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온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토론토에서 그들 모두에게 적당히 어필할 수 있는 가격과 레시피 였다.


가게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메뉴는 "커피"였다.고상한 아버지의 취향에 맞게 신선한 아라비카 원두를 사용하여 커피를 내려서 제공했다. 가끔 일찍 눈이 떠지면 새벽에 부모님과 함께 가게에 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가게 앞에 줄이 쪽 서있었다. 그 추위에 매일 줄을 서있는걸 보면 정말 대단한 커피 사랑이다. 가끔 늦잠을 자거나 차가 막혀 10분이라도 늦으면 그들의 아우성이 장난이 아니다. 줄은 대략 10 ~ 15명 가량이 매일 서있는데 항상 비슷한 사람들의 구성이었다. 한번 단골을 정하면 거기만 가는게 그들의 특징인것 같다. 아침은 여기서 먹구 , 점심은 거기, 저녁은 ..뭐 그런 식이다.


그 중 기억나는 사람들이 "잉그릿" 부부다. 부인의 이름이 잉그릿 이었고 남편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두분 다 선생님 이었다 가 은퇴 했는데 부인의 이름은 까먹을 수가 없는게 그 발음을 나보고 해보라 해서 한 20번은 외친 뒤에야 OK를 받았다. 암튼 그 부부를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들의 확연한 차이를 느꼈었다. 당시 내 생각에 카페는 일이 있거나 누구를 만나기 위해 가는곳이고 , 커피를 마셔도 한번이지 같은곳을 두번 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부부는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6번 우리 가게를 찾았다. 거의 시간이 정확했으므로 그들의 방문으로 시간을 짐작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들을 위해 6번째 방문시에는 커피값을 받지 않기로 했다. 그 작은 일에 어찌나 감사해 하고 심지어 감동까지 하는지 그들의 감수성이 정말 부러울 정도였다.


다른 이들 중에도 하루 2번 내지 3번을 방문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아침 내지 점심은 꼭 우리 가게에서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메뉴를 투데이 메뉴로 돌려가며 가격을 할인했다. 우리도 재료 수급이 편하고 그들도 좋아했다.^^


식사 손님 중 특이했던 이가 있었는데..사람이 아니고 "시베리안 허스키" 였다. 얼굴 중앙에 정확히 X 자가 선명하여 정말 멋지게 생긴 강아지 였는데 ( 강아지라 하기엔 좀 크다 ^^ ) 12시 즈음이 되면 늘 바구니를 물고 가게에 온다. 가끔 주인이랑 같이 올때도 있는데 대부분 혼자 온다. 집을 물어보니 두블럭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란다. 정말 "세상에 이런일이" 에 나올만한 대단한 녀석인데 가게로 들어오지도 않고 시간이 되면 문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구니엔 돈과 메뉴가 적힌 쪽지가 들어있다. 가끔 우유를 같이 사가기도 하기 때문에 돈은 넉넉히 들어있다. 기가 막힌건 잔돈을 주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고 앉아있는다.어떻게 아는걸까? 잔돈이 있다는걸...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이 없다. 아..갑자기 보고 싶다. 아마 지금은 이세상에 없겠지? 그가 떠날때 주인은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었겠지? 나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주인은 오죽할까?...


가게를 운영하면서 정말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추억이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들이다.

하나씩 생각 날 때 마다 적으며 옛생각에 빠질 수 있을것 같다. 블로그에 좋은 점이 이런거 아닌가 싶다.



  1. Dreaming Utopista 2018.04.02 16:48 신고

    혹시 저희 가게를 기억 하시는 분 계실까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럼 정말 재밌을것 같아요...ㅋㅋㅋ

  2. 금빛향기 2018.04.14 20:54 신고

    글 잘 읽었습니다 ^^ 좋은 추억이 있는 공간이네요~

캐나다 이민 / 미국이민

토론토 공항

2016년 3월에 영주권을 받고 미국에 첫 발을 디딘지도 벌써 2년이 훌쩍 지나갔다. 사실 이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내가 또다시 이민을 가게 될 줄은 몰랐다. 1997년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에 가있을 무렵 갑자기 캐나다로 이민을 가겠다는 아버지의 발표가 있었다. 사실 이민을 가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이건 뭔가 하는 허무감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 않았기에 거부감도 없었다.   


1999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PR여권을 손에 쥐고 성급히 친구가 있다는 토론토로 거주지를 옮겼고 우선 급한대로 집을 얻어 당시 중학생이던 내 동생과 나 이렇게 둘만 한국에 남겨져 있었다. 토론토에 집을 얻고 친구가 하고 있다는 가게를 인수하고 나면 우리도 합류 하기로 하는 그런 시나리오 였다. 그해 겨울 쯤 부모님이 부랴부랴 한국에 오셔서 예전 사시던 집을 새로이 전세 주고 우리를 데리고 캐나다로 향했다. 에어캐나다를 탔던걸로 기억한다.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오랜 시간을 비행하고 (16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서 3끼를 먹고 간식까지 먹었다) 


도착한 토론토는 무척이나 추웠다. 생각 나는 건 어두운 저녁이라 그런가, 화려할 줄 알았던 국제도시 토론토의 공항은 예상보다 소탈해 보였던걸로 기억된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바깥 풍경은 온통 나무였다.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드넓은 잔디 마당을 보고 우리집이 주택이구나 생각했던 나는 적잖이 놀랐었다. 아파트라니 !! 적어도 내 시야에 다른 아파트 동은 보이지 않았다. 한동 짜리 아파트 인가? 그리고 입구로 들어서서 로비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아파트에도 로비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쇼파가 있는 그런 로비는 호텔에나 있는 건 줄 알았었다^^     


드디어 실감이 나기 시작 했다. 여기가 외국이구나? 이 드넓은 스케일이란... 나중에 알게된것은 27층 이었던 우리 아파트는 토론토에서도 상당히 고급 아파트에 속했다고 한다. 우리 집은 21층 이었다. 그날 밤 너무 피곤했던 나는 꿈도 꾸지 못하고 죽은 듯이 잘 잤다. 다음날 너무나도 창피한 사건이 날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체...     


아침에 일어나 21층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정말로 장관 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어느새 가게에 나가시고 없었다. 아침이 차려져 있어 부랴부랴 동생을 깨워 같이 먹는데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층 내려가서 문을 등지고 왼쪽으로 500m쯤 가면 스포츠 센터가 있으니 거기에 동생과 등록을 해서 운동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하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파트 단지 내에 스포츠 센터가 있단다. Wow!!     


동생을 데리고 스포츠 센터를 찾아갔다. 슥 둘러보니 실내 농구장, 수영장 , 스쿼시 , 탁구장 , 실내 테니스 장...나열할 수도 없이 엄청나게 넓엇다. 그리고 공짜라니!!  입주민 등록을 해야 락키 키를 받고 사용을 할 수가 있다고 하여 당당히 사무실을 찾아갔다. 거기서부터 내 굴욕은 시작 되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접수 직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난 얼어붙고 말았다. 단 한마디!! 단 한단어의 영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코리아 헤럴드 어학원에서 1년을 공부하고 원어민 선생과 농담을 따먹던 내가?!!!  멍하니 서있던 나는 결국 들어왔던 문으로 황급히 나갔다. 그리고 괜히 가만히 있던 동생에게 버럭 화를 냈다. 넌 왜 암말도 안하고 서있냐?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동생이 내게 하고 싶었던 질문 이었겠지?


집에 돌아와 씩씩거리던 나는 도저히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찾아갔다. 애먼 동생을 옆에 세워 두고 나는 당당히 외쳤다. 

I like swimming !!...ㅋㅋㅋㅋ  

I want play basketball...!!!ㅋㅋㅋㅋ  


직원은 나를 보며 어안이 벙벙한 지...눈만 껌뻑 껌뻑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나를 향해 물었다. 

" You want Registration form? "  

나 : Yes.....  

직원이 준 서류에 동 호수를 기입하고 라커키를 받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 카드를 받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될때까지 사실 말 못할 수많은 역경이 있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영어였다. 나의 이민생활의 시작은 그렇게 막을 열었다.

  1. Dreaming Utopista 2018.04.01 12:11 신고

    사진위치를 수정했더니 글이 뒤죽박죽 되어서 다시 편집 하여 넣었네요.
    안읽어 봤으면 뭔말인지 모를 수수께끼 글이 됬을 둣...

  2. 2018.04.02 05:24

    비밀댓글입니다

  3. Dreaming Utopista 2018.04.02 11:20 신고

    ㅎㅎ사실 글로 표현을 잘 못해서...
    정말 울고싶을 만큼 당황 했었어요..ㅋㅋ

  4. Deborah 2018.04.12 01:33 신고

    정말 진지하게 글을 읽어 내려 가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빵터졌어요. 하하하
    수영하고 싶고 농구를 좋아한다는 말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었던 직원분이 감사하네요. 하하
    유쾌한 출발이였네요.

    • Dreaming Utopista 2018.04.12 17:56 신고

      사실 당시에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거기 농구장이랑 수영장에서 정말 많이 놀았네요..
      다시 돌아 가고 싶을 정도로 좋은 추억 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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